로버트 달의 “권력"
Dahl, Robert A. 1957. “The Concept of Power,” Behavioral Science 2:201-215.
이 글은 로버트 달(Robert A. Dahl)의 논문 「The Concept of Power」(1957) 서두로, ‘권력’이라는 개념을 사회과학적으로 엄밀히 정의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달은 권력이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보며, 이를 “A가 B로 하여금 원래 하지 않았을 일을 하게 만들 수 있을 때, A는 B에 대해 권력을 가진다”라고 정의한다. 즉, 권력은 지위나 권한이 아니라 타인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이를 통해 행위자 간의 권력의 정도를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달은 플라톤, 마키아벨리, 홉스, 베버 등 고전 사상가들이 권력을 논했지만, 그들의 개념은 철학적·규범적 수준에 머물렀다고 지적한다. 그는 권력을 경험적이고 측정 가능한 사회과학 개념으로 발전시키려 했으며, 이를 정치학의 분석 틀로 제시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 바흐라흐와 바라츠의 「Two Faces of Power」, 루크스의 「Three Faces of Power」로 이어지며, ‘결정의 권력 → 비결정의 권력 → 인식의 권력’ 으로 발전하는 현대 권력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달은 권력을 단순한 속성(attribute)이 아니라,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 로 본다. 그는 “A가 B로 하여금 B가 원래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게 만들 수 있을 때, A는 B에 대해 권력을 가진다”라고 정의하며, 권력은 인간 행위자들 사이에서만 성립한다고 명시한다. 이러한 ‘행위자(actor)’는 개인뿐 아니라 집단, 정부, 혹은 국가도 될 수 있다. 달은 권력 관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A가 B 위에 권력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① 권력의 기반(base), ② 수단(means), ③ 범위(scope), ④ 정도(amount) 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권력의 기반(base) 은 상대방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기회를 의미하며, 예컨대 대통령의 후원 인사권, 거부권, 국민적 지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수단(means) 은 이러한 자원을 실제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위협·보상·설득 같은 중개적 행위가 포함된다. 범위(scope) 는 이러한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행위나 정책의 영역(예: 의회의 법안 통과, 예산 승인 등)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정도(amount) 는 “A가 특정 행동을 취했을 때 B가 이에 반응할 확률”로 표현될 수 있다. 달은 이처럼 권력을 확률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으로 조작화함으로써, 권력의 크기를 비교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경험적 정치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달은 권력의 양을 구체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확률적 접근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교수가 학생에게 “책을 읽지 않으면 낙제시키겠다”고 위협했을 때, 학생이 실제로 책을 읽을 확률을 이라 하고, 위협이 없을 때 책을 읽을 확률을 라고 하면, 교수의 권력은 두 확률의 차이 로 정의된다. 즉, A의 권력은 A의 행위가 B의 행동을 변화시킬 확률적 영향의 크기를 의미한다. 만약 라면 A는 B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므로 권력은 0이다. 반대로 , 이라면 A는 완전한 권력을 가진다. 흥미롭게도 달은 ‘부정적 권력(negative power)’의 가능성도 인정하는데, 이는 A의 행동이 오히려 B가 원래 하려던 행동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을 때를 뜻한다(예: 부모가 금지하면 자녀가 더 하려는 경우).
이러한 접근은 권력의 존재를 단순히 ‘있다/없다’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 가능한 정도의 차이로 수량화하려는 시도다. 달은 이를 통해 스탈린이 루즈벨트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다고 말하거나, 한 상원의원이 제명 이후 권력을 잃었다는 식의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그는 권력을 비교할 때 권력의 기반(base), 수단(means), 범위(scope), 강도(amount) 같은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컨대, 달의 모델은 권력을 추상적 개념이 아닌 관찰 가능한 확률적 관계로 전환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의 크기를 경험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도구로 만든 것이다.
달은 두 행위자의 권력을 비교하려면 단순히 그들이 가진 ‘권력의 근거(base)’나 ‘수단(means)’만을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권력 비교를 위해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① 권력의 기반(base), ② 사용 방식(means), ③ 영향 범위(scope), ④ 영향받는 대상의 수(number of respondents), ⑤ 행동 변화의 확률적 차이(M, amount of power). 이 중 앞의 두 요소는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자 측의 속성이고, 뒤의 세 요소는 상대방의 반응(response)에 해당한다. 그는 진정한 비교의 의미는 결과—즉, 상대의 행동 변화를 얼마나 유도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연구자는 행위자의 자원이나 전략을 분석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는지 관찰할 때만 두 사람의 권력 차이를 과학적으로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은 이러한 비교를 단일 지표로 환원하기 어렵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적은 수의 사람에게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작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수가 10명의 학생을 거의 확실하게 수업에 참석하게 만드는 것과, 경찰이 50% 확률로 주차 위반을 막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달은 이처럼 범위, 대상 수, 확률 변화라는 세 변수의 결합에는 직관적으로 만족스러운 통합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다만, 특정 조건(예: 두 변수는 동일하고 한 변수만 다를 때)을 통제한다면, 남은 변수의 차이를 기준으로 ‘A가 B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정리한다. 이는 권력 비교가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명시적 변수 간의 관계를 통해 논리적으로 규정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시도였다.
달은 먼저 권력의 범위(scope) 를 비교하려면 “A가 B보다 더 많은 종류의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가”를 판단해야 하지만, 이 범위를 정량화하는 일은 연구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들에게 매일 씻고 양치하게 만드는 것과 이웃이 아들에게 아침마다 침대로 음식을 가져오게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넓은 범위의 권력’인지를 단일 척도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권력의 범위가 ‘넓다’는 판단은 보편적 이론이 아니라, 연구 맥락과 목표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의 대상 수(number of respondents)를 비교할 때도 두 집단이 서로 비교 가능한 대상군이어야 한다. 대학생 49명을 설득하는 것과 상원의원 49명을 설득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권력 비교는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대상의 사회적 중요성과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세 번째 변수인 행동 변화의 확률 차이(M) 만이 상대적으로 명확한 기준을 제공한다. 두 행위자가 동일한 범위와 동일한 수의 대상을 두고 있다면, 누가 더 높은 확률로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는가가 곧 권력의 크기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연설이 민주당 상원의원의 찬성 확률을 0.6에서 0.8로 높인다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한 셈이다. 달은 이것이 자신이 이전에 제시한 공식 (A의 행위가 B의 행동에 미치는 확률적 변화의 크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정리한다. 즉, A의 권력은 동일한 조건에서 B의 권력보다 크기 위해서는, A가 유도할 수 있는 반응의 확률 변화(M)가 더 커야 한다는 것이다.
달은 두 행위자 와 가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될 수 있을 때, 그들의 권력은 확률적 영향력의 크기(M) 에 따라 서열화(ranking)될 수 있다고 본다. 즉, 만약 두 행위자가 비교 가능한 관계에 있다면 인 경우 A가 B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다. 이런 관계가 여러 쌍에 적용될 수 있다면, 권력의 순서는 이론적으로 이행적(transitive) 이므로 집단 전체의 권력 구조를 계량적으로 서열화할 수 있다. 그러나 달은 “원리와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연구에서는 ‘권력의 양’을 수치화하기 어렵고, 비교하려는 행위자나 상황이 진정으로 “권력적으로 비교 가능한가(power comparable)”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남부 도시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사회 권력 연구를 사례로 든다. 연구자들은 “어떤 10명을 지역사회 지도자로 선택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피라미드형 권력 구조’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달은 그 연구가 이슈별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세금, 교육, 산업유치 등 서로 다른 영역의 결정이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는지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관된 지배 엘리트가 존재한다”는 결론은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행위자(A, B), 수단(means), 대상(respondents), 반응(responses) 이 모두 서로 비교 가능한 경우에만 권력의 크기를 엄밀히 비교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즉, 연구자는 권력을 수학적으로 정의하기 전에, 먼저 “비교 가능한 관계와 맥락”을 설정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권력 서열화는 단순한 인상비평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달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