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국제사회의 경성법과 연성법

Kenneth W. Abbott and Duncan Snidal, Hard and Soft Law in International Governance (2000)

Nov 6, 2025
국제사회의 경성법과 연성법

현대 국제관계는 전례 없이 높은 수준으로 법제화되어 있지만, 그 법적 형식과 강도는 매우 다양하다. 일부 국제기구나 제도는 법적 구속력(Obligation), 규정의 명확성(Precision), 해석 및 집행 권한의 위임(Delegation)이 모두 높은 ‘강한 법(hard law)’의 이상형에 가깝지만, 대부분의 국제법은 이 중 하나 이상이 약화된 ‘연성법(soft law)’ 형태를 띤다. 저자들은 이러한 다양성이 단순한 불완전성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자들이 구체적 정치적·경제적 상황에 맞춰 전략적으로 제도를 설계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Hard law는 거래비용을 줄이고, 약속의 신뢰성을 높이며, 불완전 계약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동시에 국가의 자율성을 제약하고 협상의 유연성을 떨어뜨리는 비용이 따른다. 따라서 행위자들은 협력의 이익과 주권 제약 간의 균형을 고려해 다양한 수준의 법제화를 선택한다.

반면 soft law는 hard law에 비해 형식적 구속력은 약하지만, 정치적 현실과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데 유연하고 효율적인 도구로 작동한다. 예컨대 주권 민감한 사안이나 선호가 이질적인 국가들 간에는 soft law가 타협과 학습(learning)의 과정, 즉 점진적 제도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다. 또한 soft law는 단순한 ‘미완의 법’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hard law보다 더 적합한 제도적 해법이 될 수 있다. 저자들은 국제법이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계약(contract)’일 뿐만 아니라, 공동의 규범적 가치를 구현하는 ‘언약(covenant)’으로도 기능한다고 본다. 국제 행위자들은 이익과 규범, 현실적 제약과 이상적 가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hard law와 soft law의 조합을 전략적으로 선택하며, 이러한 선택이 바로 현대 국제법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형성한다.

국제법(hard law)는 국가 간 신뢰를 제도적으로 보강한다. 국제정치는 무정부 상태이기 때문에 국가들은 서로의 약속을 의심하지만, 법제화는 이러한 불신을 완화한다. 경성법는 규칙을 명확히 하고, 법원이나 중재기구에 해석권을 위임함으로써 각국이 자기 이익에 맞게 약속을 왜곡 해석하는 것을 막는다. 또한 위반 시 평판이 전체 협정으로 확산되므로, 법적 약속을 깨는 비용이 높아져 약속의 신뢰성이 강화된다.

경성법 또한 일정 수준의 집행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WTO나 EU 같은 제도는 법적 판단을 통해 위반 여부를 공식화하며, 정당한 보복(countermeasures)을 허용함으로써 무질서한 대응을 제도화한다. 국제법이 국내법에 편입되면 사법기관과 시민이 그 약속을 강제할 수 있게 되어, 법적 구속력은 더욱 커진다. 피노체트 사건처럼 국제규범이 국내재판에서 적용된 사례는 이러한 효과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하드 로는 규범적·담론적 힘을 갖는다. 조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규범(pacta sunt servanda)과 성실의 원칙(good faith)을 내면화시키며, 이를 어기면 국제사회에서 정당성을 잃는다. 법적 언어는 이해관계 중심의 주장보다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며, 국가들은 자신의 행동을 법적으로 정당화하지 않으면 평판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경성법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신뢰·평판·도덕·국내제도까지 연결된 복합적 신뢰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들은 국제법의 “강한 법제화(hard legalization)”가 협력의 유지·관리비용을 줄이고, 정치 전략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점을 강조한다. 첫째, 모든 협정은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고 해석되어야 하는데, 법제화가 강할수록 이러한 ‘관리(managerial)’ 과정이 더 체계적이고 예측 가능해진다. 경성법 기존 규칙과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하도록 요구해 재협상 부담을 줄이고, 전문적인 법 절차를 통해 협상을 안정시킨다. WTO의 분쟁해결제도처럼, 일방적 보복 대신 제도화된 절차를 통해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협력의 거래비용을 낮춘다.

둘째, 법제화는 협정 위반에 대응하는 ‘요구자(demandeurs)’에게 유리한 도구로 작용한다. 상대방의 불이행 가능성이 높거나 탐지가 어려울수록, 법적 구속력이 강한 제도는 집행비용을 절감하고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하드 로는 설득·재협상·강압보다 효율적인 집행수단이며, 합의에 적극적인 행위자일수록 이를 선호한다. 반면, 자율성을 중시하거나 유연성을 원하는 국가는 {O,p,D}와 같은 약한 법제화를 선호한다.

조합
설명
사례
{O,P,D}
법적으로 의무적이고, 구체적이며, 제3자 집행 있음 → 완전한 경성법
WTO 분쟁해결제도, EU 법
{O,P,d}
법적으로 의무지만, 집행기구 없음 → “구속은 있으나 스스로 해결해야 함”
국제인권규약 (위반 시 법원 없음)
{O,p,D}
법적 의무는 있지만, 내용이 모호함 → 해석을 법원이 결정
환경협약(예: 기후변화협약)
{o,P,D}
구속력은 약하지만, 명확하고 제3자 있음 → 정치적 합의 + 법적 절차
WTO 권고적 결정
{o,p,d}
완전한 soft law → 정치적 약속 수준
G20, ASEAN 선언

셋째, 경성법은 정치의 작동방식 자체를 바꾸는 제도적 환경을 형성한다. 법적 절차와 정치적 협상이 결합되면서 분쟁은 법의 언어로 다루어지고, 법적 제도는 새로운 전략의 장이 된다. 예컨대 ICTY에서는 국가가 직접 기소하지 못하더라도 로비나 여론을 통해 법적 과정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또한 국제협정이 국내법에 편입되면, 개인이나 NGO가 소송을 제기해 국가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선진국처럼 법적 전문성과 자원이 풍부한 국가는 이러한 제도적 공간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적 갈등을 법적 논증으로 전환시켜 관리하는 데서 이익을 얻는다.

국가들은 협정의 신뢰성과 집행력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상세한 조항을 포함하려 하지만, 완전한 계약(complete contract)을 작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불확실성과 정보 비대칭, 제한된 합리성 때문에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정밀한 규정은 오히려 경직성과 비효율을 초래하고, 협상 자체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국가는 사법기관이나 행정기구에 해석과 적용 권한을 위임(delegation)함으로써 불완전성을 보완한다. 이런 제도적 위임은 구체적 조항이 불충분하더라도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법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며, 특히 협력의 이익이 크지만 세부 조정이 어려운 사안에서 선호된다.

반면, 경성법은 협력의 안정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계약비용(contracting costs)이 매우 크다. 협상, 초안 작성, 법률 검토, 비준 절차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고, 각국의 법체계와 정치적 이해가 달라 조율이 어렵다. 이에 비해 연성법은 구속력은 약하지만 협상 비용이 낮고, 정치적 유연성이 높으며, 국가들이 새로운 제도나 규범을 시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나 IAEA의 비구속적 지침, GATT의 임시협정처럼, 이러한 연성법은 완전한 합의가 어려운 상황에서 실질적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타협적 제도 형태로 작동한다.

국가가 구속력 있는 국제협정을 수락할 때 감수해야 하는 자율성의 손실을 주권 비용(sovereignty costs)이라 하며, 이는 단순한 정책적 제약에서부터 초국가적 기구에 권한을 위임하거나, 국민·영토에 대한 통제권이 침해되는 수준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비용 때문에 국가는 강한 법적 구속력(hard law)을 꺼리며, 대신 구속력이 약한 연성법(soft law)이나 불명확한 규범을 선택해 자율성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위임된 권한은 예기치 않게 확대되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한다. 유럽사법재판소(ECJ), WTO, IMF 등은 초기 의도보다 더 독립적으로 작동하며 국가의 정책 자율성을 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들은 협력의 편익이 주권 비용을 상회할 때, 혹은 국내 이해관계자들이 국제규범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때, 일정 수준의 법제화를 수용한다. 따라서 국제 제도의 경도(hard–soft)는 각 사안의 특성과 국가의 이해, 그리고 감내 가능한 주권비용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수준
설명
예시
① 낮음
특정 행동을 제한하는 조약 (ex. 관세 인하, 무역규범 등)
자유무역협정: 국내 노동·환경 정책에 일부 제약
② 중간
외부 기관에 정책 결정권 일부 위임
WTO 분쟁해결기구, EU 사법재판소(ECJ)
③ 높음
국가-국민 관계, 영토 문제에 직접 개입
국제인권규범, 국제형사재판소(ICC), 해양법협약
Callout icon'

When exactly international courts like the ECJ or the WTO Appellate Body started to act in ways that member states hadn’t anticipated. At what point did these institutions cross the line from delegated authority to independent rule-making? And if we think about these developments, should we really see them only as a loss of sovereignty, or could they also represent a kind of institutional learning that improves rule consistency and accountability?”

국제문제는 복잡하고 새로운 영역이 많아, 국가들은 협정의 모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불확실성 하에서 강한 법적 구속력(hard law)은 예기치 못한 비용과 주권침해 위험을 높이므로, 국가는 연성법을 통해 위험을 관리한다. 연성법은 (1) 약속의 정확성(precision)을 낮춰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합의를 가능하게 하고, (2)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구체적 지침을 제공하는 합의(예: Agenda 21, Forest Principles)를 통해 실제 효과를 시험하며, (3) 정치적·행정적 수준의 중간 위임(moderate delegation)을 활용해 국제기구가 정보를 제공하고 규범을 점진적으로 조정하도록 한다. 이런 접근은 환경, 기술, 보건 등 불확실성이 높은 영역에서 특히 효과적이며, 예외조항이나 유연한 재협상 절차를 통해 국가의 정책적 자율성을 보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성법은 학습과 제도적 적응(adaptation)의 과정으로 발전한다. 비엔나 오존협약처럼 구속력은 약하지만 포괄적 의무만을 규정한 협정은 국가들이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규범을 구체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대표적으로 FAO–UNEP의 유해 화학물질 사전통보제(PIC)는 1980년대 비구속적 지침에서 출발해, 정보공유와 기술협력을 거치며 1998년에는 실질적인 조약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연성법은 초기 불확실성을 완화하면서 협력의 초기 이익(easy gains)을 확보하고, 이후 상황 변화에 따라 제도를 점진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유연한 제도적 틀(flexible institutional framework)로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연성법은 높은 주권비용과 불확실성의 조합 속에서 국가들이 협력을 유지하고 제도적 진화를 모색할 수 있는 합리적 적응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연성법(soft law)은 다양한 이해와 역량을 가진 국가들 간의 협상에서 유연한 타협의 도구로 작동한다. 강한 법적 구속력을 가진 협정은 협상 비용이 높고 이행 부담이 크지만, 연성법은 포괄적 목표를 제시하면서도 구체성·위임 수준을 낮춰 합의를 용이하게 한다. 이를 통해 각국은 자국의 정치·경제적 여건에 맞게 약속을 조정할 수 있고, 불확실하거나 논쟁적인 사안은 모호한 조항이나 비구속적 합의로 처리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NAFTA의 노동·환경 부속협정, 1996년 바사나르 체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협상의 교착을 피하고 광범위한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실용적 절충안으로 기능한다. 다만 연성법은 구속력이 약하기 때문에 이행 점검이 어렵고, 정치적 변동이나 국내 행위자에 의해 쉽게 무력화될 수 있다는 한계도 지닌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연성법은 단순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점진적 제도화와 규범 내면화의 경로가 될 수 있다. 헬싱키 프로세스처럼 초기에는 비구속적 인권 합의가 시간이 지나며 체제 변화를 촉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연성법이 경성법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 불확실성과 주권비용이 높은 영역에서는 지속적인 연성화가 더 합리적일 수 있다. 또한 연성법은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타협을 가능하게 하여, 강자는 낮은 위임을 통해 통제력을 유지하고, 약자는 법적 보호와 제도적 평등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결과적으로 연성법은 불확실성과 권력 불균형 속에서 협력을 유지·조정하는 균형적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저자들은 또한 강대국–약소국 간의 타협 구조와 비국가 행위자의 등장을 중심으로, 연성법(soft law)이 국제정치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먼저 약소국은 강대국의 요구에 순응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경우 국내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국제기구를 통한 연성적 제도화(laundering)를 활용해 강대국의 영향력을 우회적으로 수용한다. 해양법협약(UNCLOS)과 핵확산금지조약(NPT)은 이런 정치적 타협의 대표 사례로, 높은 의무성과 명확성을 가지면서도 위임 수준을 제한해 강대국의 통제력을 유지했다. 이처럼 연성법은 권력 불균형 속에서 정치적 정당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또한 저자들은 국제법제화의 범위를 국가에서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s)로 확장한다. 기업, 전문가 네트워크, NGO 등 다양한 집단이 국제 규범 형성에 직접 참여하면서, 국제법은 다층적 정치 과정으로 진화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관점이 제시된다.

1️⃣ 다원주의(pluralism): 국내 집단 간 상호작용이 국가 선호를 결정하며, 다양성이 클수록 연성법이 선호됨.

2️⃣ 공공선택론(public choice): 관료들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구속력은 약하되 명확한 규범을 선호함.

3️⃣ 국가주의(statism): 국가는 여전히 핵심 행위자로, 주권비용을 줄이기 위해 연성법을 전략적으로 활용함.

결국 연성법은 권력의 불균형, 국내정치 제약, 시민사회 압력 속에서 협력과 자율성의 균형을 제도화하는 정치적 타협의 도구다.

이 결론 부분에서 저자들은 국제 법제화(legalization)를 연성법(soft law)에서 경성법(hard law)까지 이어지는 연속선으로 보고, 그 다양한 형태가 행위자들이 직면한 서로 다른 문제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방식임을 강조한다. 법제화는 주권비용과 이익의 균형 속에서 작동하며, 연성법은 불확실성·권력 격차·이해관계 충돌을 완화하는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된다. 또한 법제화는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규범적 담론을 형성해 행위자의 행동과 정체성을 제약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국제정치와 국제법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며, 법의 형성 자체가 정치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향후 국제법제화가 반드시 경성화(hardening)로 나아가리라 보지 않으며, 연성법 또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제도적 형태이자 국제정치의 핵심적 특징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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