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적 자유주의와 선의의 제국
박성우. (2026). 밀: 계몽적 자유주의와 선의의 제국. 박성우 외 저, 『서양국제정치사상』. 아카넷.
밀의 정치사상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to)를 넘어, 사회적 다수의 횡포와 권위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를 강조한 19세기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원형이다. 그는 18세기 이전의 핵심 가치였던 '자기 지배(self-ruling)'가 근대 대의제 안에서 다수의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에 밀은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위해(또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제시하며, '자기 관련 행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했다. 이는 적극적 자유가 도덕이나 관습의 이름으로 악용될 소지를 막기 위한 '소극적 자유'의 옹호였다.
그러나 밀의 이 자유주의는 비유럽 지역을 향한 대외 정책인 '제국주의'와 만나는 지점에서는 기묘한 예외가 있다. 밀에게 제국주의는 자신이 신봉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을 비유럽 지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이었다. 그는 스스로 진보할 능력이 결여된 사회를 '문명화의 대상'으로 분류하고, 인류 전체의 진보를 위해 이들에 대한 간섭과 통치를 허용했다. 즉, 타자 관련 행위가 아닐지라도 '문명화'라는 거대 담론 안에서 국가의 개입 명분을 찾은 것이다.
밀의 논증 구조는 로크나 칸트가 세운 '배제의 메커니즘'과 꽤나 비슷하다. 로크가 폭군을 "이성을 버린 짐승"으로 규정하고, 칸트가 보편적 질서를 위협하는 "부당한 적"을 상대로 연합된 제지를 허용한 것처럼, 밀은 대상을 '문명'과 '미개'로 나누어 도덕적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냈다. 상대를 공동체 바깥의 존재로 명명하는 순간, 그들에 대한 무력 사용이나 주권 침해는 살인이 아니라 '정당한 제거'나 '필요한 개입'으로 세탁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정당화하려면 먼저 그 죽음이 보편적 금지의 예외임을 증명해야 한다. '살인은 안 된다, 하지만 이건 살인이 아니다'라는 이 교묘한 수사가 작동하려면 예외를 만드는 '기준'과 그 기준을 세우는 '권력'이 필요하다. 밀이 주장한 인류 전체의 진보를 위한 개입은 오늘날 '보호책임(R2P)'의 모태가 되어, 강대국에게는 개입의 정당성을 제공하고 약소국에게는 주권 침해의 위협이 되는 양면적 언어로 작동하고 있다.
필머가 신의 이름이라 부른 것을 밀은 '이성'과 '진보'의 이름으로 재건했다. 누군가를 도덕적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낸 다음, 그 죽음이나 억압에 정의, 문명, 진보라는 이름을 붙이는 구조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예외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범주는 과연 가능한가. 정의로운 전쟁이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범주가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폭로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추가) 존 로크, Two Treaties of Government
1. 이성과 자연법: 공존 가능한 '자연상태'의 설계
로크의 자연상태가 홉스식의 공포와 대비되는 이유는 인간이 이성(Reason)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자기보존의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이성은 타인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자연법(Law of Nature)을 가르친다. 따라서 로크의 자연상태는 완벽한 협력은 아닐지라도, 각자가 이성의 힘을 발휘해 자연법을 준수한다면 대체로 평화로운(roughly peaceful) 공존이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연법 위반자를 통제할 권한이 특정 권력자가 아닌 '모든 개인'에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이는 국제관계에서 상위 정부가 없어도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2. 국가 형성의 경로와 '입법권'의 최고성
자연상태의 평화가 불안정한 이유는 이성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위반자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판결의 편파성이나 집행의 불확실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사회계약을 맺고, 개별적인 자연법 집행권을 공동체(제3자)에 양도하여 국가를 형성합니다. 이때 로크가 가장 강조한 것은 무엇이 정당한 자연법인지를 선언하는 입법권(Supreme Power)이다. 국가는 단순히 폭력을 독점하는 기구가 아니라, 자연법을 명확한 실정법으로 확립하여 구성원의 소유권과 자유를 보호하는 보존 메커니즘의 개선책으로서 존재 의미를 가진다.
3. 국제관계의 유추: '국가이성'으로의 변질 거부
국가가 형성된 이후에도 국가 간의 관계는 여전히 상위 권력이 없는 자연상태에 머문다. 여기서 로크의 독특함은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해서 그 행위 원리가 '국가이성(Reason of State)'이라는 특수한 논리로 전이(transition)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로크는 홉스나 마키아벨리 같은 현실주의자들과 달리, 국가 형성 이후에도 내부와 외부의 도덕을 분리하지 않는다. 현실주의자들은 국가가 생기면 외부 세계는 약육강식의 전쟁상태가 된다고 보지만, 로크에게 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대리인'일 뿐이다. 따라서 개인 간에 적용되던 자연법적 이성은 국제관계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국가도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하므로,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야만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제한적 평화'가 가능한 공간이 된다.
가장 독특한 점은 자연법 위반자에 대한 '보편적 처벌권'. 로크는 『통치론』에서 통치자가 외국인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법 집행권'에서 찾음. 이를 국제관계에 대입하면, 특정 국가가 보편적 정의나 인권 같은 자연법을 어겼을 때 국제사회가 그 국가를 제재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 됨. 결국 국제관계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누가 자연법을 위반했는지 확인하고 징벌할 수 있는 도덕적·법적 판단의 공간이 된다.